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5인조 (문단 편집) == 구성원들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알렉산드르 보로딘]], [[세자르 큐이]]와 [[밀리 발라키레프]]다. 이 중 [[밀리 발라키레프]]가 모임을 주도했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차이콥스키와 마찬가지로 모두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다. 최소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발라키레프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보로딘은 [[화학]]을 전공했고 화학자로도 활약했다. 큐이는 육군 장교로 축성법을 가르쳤었고, 무소륵스키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해군 장교였다. 이처럼 그들의 본 직업은 음악과 관련이 없는 것이었고, 발라키레프를 제외하면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적도 없으며[* 그래서 초기에는 발라키레프가 나머지 네 명에게 작곡법 등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들이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귀족들은 예체능과 관련된 분야를 전부 '취미'로 간주했으며 모든 귀족은 직업적으로 군인이 아니면 공무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작곡가 같은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러시아 5인조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원치 않는 직업을 선택해야 했고 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면서 자연히 어릴 적 꿈을 이루려 했던 것이다. 출처 : 나타샤 댄스] 외국에 나가 음악을 배운 경험들은 더더욱 없다. 서유럽식 음악에 대해 교육을 받지 못한 것과 해외 경험이 없는 것이 오히려 러시아의 민족적 색채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재미있게도 이런 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들 5명은 나이나 성장 과정, 직업에 공통점이 없다. 모임은 1856년 발라키레프와 큐이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듬해에 무소륵스키가 참여하고, 1861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 1862년에 보로딘이 마지막으로 참가한다. 5명이 모두 모인 1862년 기준으로 모두들 젊은 작곡가였는데, 제일 어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세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20대였다. 젊다는 것 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 독학으로 음악을 배웠다는 점과 음악이 직업이 아니었다는 점이 그들의 공통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